復 복
아래괘 震 우레 · 위괘 坤 땅
사물은 끝내 다해 버릴 수 없으며, 벗겨짐이 위에서 궁하면 아래로 돌아오므로 복괘로 이었다.
괘사
亨。出入无疾,朋來无咎。反復其道,七日來復,利有攸往。
형. 출입무질, 붕래무구. 반복기도, 칠일래복, 이유유왕.
형통하다. 나가고 들어옴에 탈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그 길을 되돌아오며, 이레 만에 다시 돌아온다.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단전
復亨;剛反,動而以順行,是以出入无疾,朋來无咎。反復其道,七日來復,天行也。利有攸往,剛長也。復其見天地之心乎?
복이 형통한 것은 굳센 양효가 돌아와, 움직이되 순함으로써 행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가고 들어옴에 탈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그 길을 되돌아오며 이레 만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다.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로운 것은 굳센 양효가 자라기 때문이다. 복에서 아마도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대상전
雷在地中,復;先王以至日閉關,商旅不行,后不省方。
우레가 땅속에 있는 것이 복이다. 선왕은 이로써 동짓날에 관문을 닫아 상인과 나그네가 다니지 않게 했으며, 임금도 지방을 순찰하지 않았다.
여섯 효
효사
不復遠,无袛悔,元吉。
불복원, 무지회, 원길.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니, 큰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다. 크게 길하다.
소상전
不遠之復,以修身也。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이로써 몸을 닦는 것이다.
효사
休復,吉。
휴복, 길.
아름답게 돌아온다. 길하다.
소상전
休復之吉,以下仁也。
아름답게 돌아와 길한 것은 아래에 있는 어진 이에게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효사
頻復,厲无咎。
빈복, 려무구.
자주 돌아온다.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
소상전
頻復之厲,義无咎也。
자주 돌아와 위태로우나, 의리상 허물이 없다.
효사
中行獨復。
중행독복.
가운데로 행하여 홀로 돌아온다.
소상전
中行獨復,以從道也。
가운데로 행하여 홀로 돌아오는 것은 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효사
敦復,无悔。
돈복, 무회.
도탑게 돌아온다. 뉘우침이 없다.
소상전
敦復无悔,中以自考也。
도탑게 돌아와 뉘우침이 없는 것은 가운데를 얻어 스스로를 살피기 때문이다.
효사
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
미복, 흉, 유재생. 용행사, 종유대패, 이기국군, 흉. 지우십년, 불극정.
돌아갈 길을 잃으니 흉하고 재앙과 과실이 있다. 군대를 움직이는 데 쓰면 끝내 크게 패하고, 그 나라의 임금에게까지 미쳐 흉하다. 십 년에 이르도록 정벌할 수 없다.
소상전
迷復之凶,反君道也。
돌아갈 길을 잃어 흉한 것은 임금의 도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네 해석의 갈림길
갈리는 지점'칠 일'이라는 같은 구절을 정이천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돌아오는 절기의 이치로 풀지만, 주희는 점친 일이 실제로 회복되는 시기라는 실용적 뜻까지 덧붙인다.
왕필
복은 움직임이 다한 뒤 고요한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천지의 마음이다. 왕필은 잘못에서 멀어지기 전에 신속히 돌아오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며, 미혹을 오래 끌지 않는 것이 길함의 관건이라고 본다.
정이천
정이천은 복을 음이 극에 이른 동지에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다시 생기는 괘이자 군자(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적 원칙을 지키는 사람)의 도와 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풀이한다. 미약한 양은 혼자서 여러 음을 이기지 못하므로 병 없이 자라고 벗들이 함께 와야 만물을 낳고 공적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칠 일은 구괘에서 양이 사라지기 시작한 뒤 일곱 번의 변화가 지나 복괘가 되는 주기다. 그는 고요함 자체가 아니라 움직임이 막 시작되는 단서에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효들은 잘못에서 돌아오는 여러 양상을 나눈다. 초구(첫째 자리의 양효)는 잘못이 멀리 가기 전에 즉시 고쳐 크게 길하고, 육이(둘째 자리의 음효)는 어진 초구에게 낮추어 아름답게 돌아온다. 육삼은 자주 잃고 자주 돌아와 위태롭지만 돌아옴 자체에는 허물이 없다. 육사는 다수의 음 가운데서 홀로 바름을 따르지만 힘이 약해 성과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육오는 중순으로 스스로를 돈독히 하고, 상육은 끝내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아 모든 행동과 군사·통치가 흉해진다.
주희
주희는 복을 박괘가 순수한 곤이 된 시월부터 땅 아래 양기가 생겨 한 달 넘게 쌓인 뒤 십일월에 한 양효(끊기지 않은 선으로 표시한 굳센 효)의 몸체를 이루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오월 구괘의 한 음효(가운데가 끊긴 선으로 표시한 부드러운 효)에서 복괘의 한 양효까지 일곱 효를 지나므로 ‘칠 일’은 점친 일이 회복될 시기이기도 하다. 안의 진이 움직이고 밖의 곤이 순하므로 병 없이 출입하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으며, 굳센 덕이 자라므로 나아가는 것이 이롭다.
‘천지의 마음’에서는 쌓인 음 아래에서 양이 다시 생기는 순간을 거의 사라졌던 생물의 마음과 인간의 본심이 다시 보이는 단서로 설명하고, 소강절의 동지 시를 모두 인용한다. 육사(넷째 자리의 음효)에서는 양기가 약해 성과를 낼 수 없어도 이치상 선을 따르는 행위는 길흉과 이익을 계산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며 동중서의 말을 연결한다. 상육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상이므로 재앙·패전·통치의 흉함이 한꺼번에 따른다.
정약용
복괘는 박괘와 곤괘를 거쳐 한 양이 초효로 되돌아온 괘이다. 정약용은 ‘일곱 날’을 구괘에서 복괘까지의 일곱 괘이자 하지에서 동지까지의 일곱 달로 풀이하고, 각 효를 예ㆍ췌ㆍ소과ㆍ관ㆍ임괘와의 교역 및 효의 이동으로 검증한다. 멀지 않은 복귀는 수신, 아름다운 복귀는 인을 낮춤, 도타운 복귀는 덕의 완성인 반면, 지름길을 좇아 근본을 버린 상육(맨 위 자리의 음효)의 복귀는 군대와 임금이 함께 패하는 미복이 된다.
현대적으로 읽기
복괘(잘못된 길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상황)
회복은 한 번의 선언보다 손상된 기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작은 단서에서 출발한다. 학습·조직·관계가 무너진 뒤 거대한 목표를 곧바로 세우기보다, 반복 가능한 최소 행동과 이를 함께 지킬 동료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 ‘벗이 온다’는 조건은 회복을 개인 의지에만 맡기지 않고 협력과 환경 설계의 문제로 보게 한다.
육삼(셋째 자리의 음효)처럼 다시 잘못하더라도 돌아오는 행동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반복을 낭만화하지 않고 실패를 부르는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 육사(넷째 자리의 음효)는 옳은 선택이 당장 성과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상육(맨 위 자리의 음효)의 ‘용행사, 종유대패’(군대를 움직이면 끝내 크게 패한다)는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무시한 채 규모만 키우면 손실도 커진다는 의사결정의 경계로 읽을 수 있다.
왕필(王弼) 《주역주》 — 64괘 주석
이 64괘 주석의 저자는 왕필(王弼)이다. 한강백(韓康伯)은 계사전 등 일부 십익 주석의 저자로, 이 층과 구분한다.
주석 원문과 전체 번역
入則為反出則長故无疾疾猶病也
朋謂陽也
陽氣始剥盡至來復時凡七日
以天之行反復不過七日復之不可遠也
往則小人道消也
復者反本之謂也天地以本為心者也凡動息則靜靜非對動者也語息則黙黙非對語者也然則天地雖大富有萬物雷動風行運化萬變寂然至无是其本矣故動息地中乃天地之心見也若其以有為心則異類未獲具存矣
方事也冬至陰之復也夏至陽之復也故為復則至於寂然大靜先王則天地而行者也動復則靜行復則止事復則无事也
最處復初始復者也復之不速遂至迷凶不遠而復幾悔而反以此修身患難遠矣錯之於事其殆庶㡬乎故元吉也
得位處中最比於初上无陽爻以疑其親陽為仁行在初之上而附順之下仁之謂也旣處中位親仁善鄰復之休也
頻頻蹙之貌也處下體之終雖愈於上六之迷已去復逺矣是以蹙也蹙而求復未至於迷故雖危无咎也復道宜速慼而乃復義雖无咎它來難保
四上下各有二陰而處厥中履得其位而應於初獨得所復順道而反物莫之犯故曰中行獨復也
居厚而履中居厚則无怨履中則可以自考雖不足以及休復之吉守厚以復悔可免也
最處復後是迷者也以迷求復故曰迷復也用之行師難用有克也終必大敗用之於國則反乎君道也大敗乃復量斯勢也雖復十年修之猶未能征也
들어가면 돌아감이 되고 나오면 자라므로 병이 없다. ‘질’은 병과 같다.
‘벗’은 양을 말한다.
양기가 처음 깎여 다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때까지 모두 칠 일이다.
하늘의 운행으로 보면 돌아옴이 칠 일을 넘지 않으니, 돌아옴이 멀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가면 소인의 도가 사라진다.
복은 근본으로 돌아감을 말한다. 천지는 근본을 마음으로 삼는다. 무릇 움직임이 쉬면 고요하지만, 고요함이 움직임에 맞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 그치면 침묵하지만, 침묵이 말에 맞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천지가 아무리 크고 만물을 풍부하게 소유하며 우레가 움직이고 바람이 불어 온갖 변화를 운행하더라도,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가 그 근본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이 땅속에서 쉬는 데서 천지의 마음이 드러난다. 만약 천지가 존재하는 사물 하나를 마음으로 삼는다면 서로 다른 부류를 모두 함께 보존할 수 없다.
‘방’은 일이다. 동지는 음이 돌아오는 때이고 하지는 양이 돌아오는 때다. 그러므로 돌아오면 고요하고 크게 안정된 데 이른다. 선왕은 천지를 본받아 행하는 자다. 움직임이 돌아오면 고요하고, 행함이 돌아오면 멈추며, 일이 돌아오면 일이 없어진다.
복의 맨 처음에 있어 처음 돌아오는 자다. 돌아오기를 서두르지 않으면 마침내 미혹되어 흉한 데 이른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후회할 즈음에 되돌아온다. 이로써 몸을 닦으면 환난이 멀어진다. 이를 일에 적용하면 거의 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길하다.
제자리를 얻어 중에 있고 초구와 가장 가깝다. 위로는 친함을 의심하게 할 다른 양효가 없다. 양은 어짊을 행하는데 초구 위에 있으면서 그 아래에 붙어 순응하니 이것이 어짊이다. 이미 중의 자리에 있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며 이웃과 잘 지내므로 아름다운 돌아옴이다.
‘자주’라는 말은 찌푸리고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하괘의 끝에 있어 상육의 미혹보다는 낫지만 이미 돌아옴에서 멀어졌으므로 괴로워한다. 괴로워하면서 돌아오기를 구하여 아직 미혹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비록 위태로워도 허물이 없다. 돌아오는 도는 빨라야 하는데 슬퍼한 뒤에야 돌아오니, 뜻으로는 비록 허물이 없어도 다른 환난이 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다.
육사의 위아래에 각각 두 음효가 있고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제자리를 밟고 초구에 응한다. 홀로 돌아갈 곳을 얻어 순한 도로 되돌아가니 사물이 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운데로 가다가 홀로 돌아온다’고 한다.
두터운 데 있고 중을 밟는다. 두터운 데 있으면 원망이 없고 중을 밟으면 스스로 살필 수 있다. 비록 아름다운 돌아옴의 길함에는 미치지 못해도 두터움을 지키며 돌아오면 후회를 면할 수 있다.
돌아옴에서 가장 뒤에 있어 미혹한 자다. 미혹된 채 돌아오려 하므로 ‘돌아옴에 미혹한다’고 한다. 군대를 움직이는 데 쓰면 환난이 생겨 이길 수 없다. 나라에 쓰면 임금의 도에 반한다. 크게 패한 뒤에야 돌아올 것이니 이 형세를 헤아려 보면, 비록 다시 십 년 동안 닦더라도 여전히 정벌할 수 없다.
복은 움직임이 다한 뒤 고요한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천지의 마음이다. 왕필은 잘못에서 멀어지기 전에 신속히 돌아오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며, 미혹을 오래 끌지 않는 것이 길함의 관건이라고 본다.
교감·번역 주
정이천 《이천역전》
주석 원문과 전체 번역
䷗〈震下坤上〉
復序卦物不可以終盡剝窮上反下故受之以復物无剝盡之理故剝極則復来隂極則陽生陽剝極於上而復生於下窮上而反下也復所以次剝也為卦一陽生於五隂之下隂極而陽復也嵗十月隂盛既極冬至則一陽復生於地中故為復也陽君子之道陽消極而復反君子之道消極而復長也故為反善之義
復亨出入无疾朋來无咎
復亨既復則亨也陽氣復生於下漸亨盛而生育萬物君子之道既復則漸以亨通澤於天下故復則有亨盛之理也出入无疾出入謂生長復生於内入也長進於外出也先云出語順耳陽生非自外也来於内故謂之入物之始生其氣至微故多屯艱陽之始生其氣至微故多摧折春陽之發為隂寒所折觀草木於朝暮則可見矣出入无疾謂微陽生長无害之者也既无害之而其類漸進而来則將亨盛故无咎也所謂咎在氣則為差忒在君子則為抑塞不得盡其理陽之當復雖使有疾之固不能止其復也但為阻礙耳而卦之才有无疾之義乃復道之善也一陽始生至微固未能勝羣隂而發生萬物必待諸陽之来然後能成生物之功而无差忒以朋来而无咎也三陽子丑寅之氣生成萬物衆陽之功也若君子之道既消而復豈能便勝於小人必待其朋類漸盛則能恊力以勝之也
反復其道七日來復利有攸往
謂消長之道反復迭至陽之消至七日而来復姤陽之始消也七變而成復故云七日謂七更也臨云八月有凶謂陽長至于隂長歷八月也陽進則隂退君子道長則小人道消故利有攸往也
彖曰復亨剛反
動而以順行是以出入无疾朋來无咎
復亨謂剛反而亨也陽剛消極而来反既来反則漸長盛而亨通矣動而以順行是以出入无疾朋来无咎以卦才言其所以然也下動而上順是動而以順行也陽剛反而順動是以得出入无疾朋来而无咎也朋之来亦順動也
反復其道七日來復天行也
利有攸往剛長也
復其見天地之心乎
其道反復往来迭消迭息七日而来復者天地之運行如是也消長相因天之理也陽剛君子之道長故利有攸往一陽復於下乃天地生物之心也先儒皆以静為見天地之心盖不知動之端乃天地之心也非知道者孰能識之
象曰雷在地中復先王以至日閉關商旅不行后不省方
雷者隂陽相薄而成聲當陽之微未能發也雷在地中陽始復之時也陽始生於下而甚微安静而後能長先王順天道當至日陽之始生安静以養之故閉關使商旅不得行人君不省視四方觀復之象而順天道也在一人之身亦然當安静以養其陽也
初九不逺復无祗悔元吉
復者陽反来復也陽君子之道故復為反善之義初剛陽来復處卦之初復之最先者也是不逺而復也失而後有復不失則何復之有惟失之不逺而復則不至於悔大善而吉也袛宜音袛抵也玉篇云適也義亦同无袛悔不至於悔也坎卦曰袛既平无咎謂至既平也顔子无形顯之過夫子謂其庶幾乃无袛悔也過既未形而改何悔之有既未能不勉而中所欲不踰矩是有過也然其明而剛故一有不善未嘗不知既知未嘗不遽改故不至於悔乃不逺復也袛陸徳明音支玉篇五經文字羣經音辨並見衣部
象曰不逺之復以修身也
不逺而復者君子所以修其身之道也學問之道无他也唯其知不善則速改以從善而已
六二休復吉
二雖隂爻處中正而切比於初志從於陽能下仁也復之休羙者也復者復於禮也復禮則為仁初陽復復於仁也二比而下之所以羙而吉也
象曰休復之吉以下仁也
為復之休羙而吉者以其能下仁也仁者天下之公善之本也初復於仁二能親而下之是以吉也
六三頻復厲无咎
三以隂躁處動之極復之頻數而不能固者也復貴安固頻復頻失不安於復也復善而屢失危之道也聖人開遷善之道與其復而危其屢失故云厲无咎不可以頻失而戒其復也頻失則為危屢復何咎過在失而不在復也
象曰頻復之厲義无咎也
頻復頻失雖為危厲然復善之義則无咎也
六四中行獨復
此爻之義最宜詳玩四行羣隂之中而獨能復自處於正下應於陽剛其志可謂善矣不言吉凶者盖四以柔居羣隂之間初方甚微不足以相援无可濟之理故聖人但稱其能獨復而不欲言其獨從道而必凶也曰然則不言无咎何也曰以隂居隂柔弱之甚雖有從陽之志終不克濟非无咎也
象曰中行獨復以從道也
稱其獨復者以其從陽剛君子之善道也
六五敦復无悔
六五以中順之徳處君位能敦篤於復善者也故无悔雖本善戒亦在其中矣陽復方微之時以柔居尊下復无助未能致亨吉也能无悔而已
象曰敦復无悔中以自考也
以中道自成也五以隂居尊處中而體順能敦篤其志以中道自成則可以无悔也自成謂成其中順之徳
上六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
以隂柔居復之終終迷不復者也迷而不復其凶可知有災眚災天災自外来眚已過由自作既迷不復善在已則動皆過失災禍亦自外而至盖所招也迷道不復无施而可用以行師則終有大敗以之為國則君之凶也十年者數之終至於十年不克征謂終不能行既迷於道何時而可行也
象曰迷復之凶反君道也
復則合道既迷於復與道相反也其凶可知以其國君凶謂其反君道也人君居上而治衆當從天下之善乃迷於復反君之道也非止人君凡人迷於復者皆反道而凶也
진(震)이 아래에 있고 곤(坤)이 위에 있다.
복괘는 「서괘전」에서 ‘사물은 끝내 다할 수 없다. 박이 위에서 궁극에 이르면 아래로 돌아오므로 복으로 받았다’고 하였다. 사물에는 모두 깎여 없어지는 이치가 없으므로 박이 극에 이르면 복이 돌아온다.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생기며, 양이 위에서 깎이기를 다하면 아래에서 다시 생긴다. 위에서 궁극에 이르러 아래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괘가 박괘 다음에 놓였다. 괘는 하나의 양이 다섯 음 아래에서 생긴다. 음이 극에 이르러 양이 돌아온 것이다. 한 해의 시월에는 음이 성하기를 이미 극진히 하고, 동지가 되면 하나의 양이 땅속에서 다시 생기므로 복이라 한다. 양은 군자의 도다. 양이 사라짐의 극에 이르렀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군자의 도가 사라짐의 극에 이르렀다가 다시 자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된다.
“복은 형통한다.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복은 형통하다. 이미 돌아오면 형통한다. 양기가 아래에서 다시 생겨 점차 형통하고 성대해져 만물을 낳고 기른다. 군자의 도도 다시 돌아오면 점차 형통하여 은택이 천하에 미친다. 그러므로 복에는 형통하고 성대해질 이치가 있다.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다’에서 나가고 들어옴은 생기고 자라는 일을 말한다. 안에서 다시 생기는 것이 들어옴이고, 자라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감이다. 먼저 ‘나간다’고 한 것은 말의 순서가 자연스러워서일 뿐 양이 밖에서 생긴다는 뜻이 아니다. 양은 안에서 오므로 들어온다고 한다. 사물이 처음 생길 때 그 기운은 지극히 미약하므로 어려움이 많다. 양이 처음 생길 때도 기운이 미약하여 꺾이는 일이 많다. 봄의 양기가 발동할 때 음의 찬 기운에 꺾이는 것은 아침저녁의 초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다는 것은 미약한 양이 생겨 자랄 때 해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미 해치는 것이 없고 그 무리가 점차 나아와 모이면 장차 형통하고 성대해지므로 허물이 없다. 이른바 허물이란 기운에서는 차질과 어긋남이고, 군자에게서는 억눌리고 막혀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이 마땅히 돌아올 때에는 설령 해치는 것이 있어도 돌아옴 자체를 멈출 수는 없고 다만 가로막을 뿐이다. 그런데 이 괘의 재질에는 병이 없다는 뜻이 있으니 복의 도가 선한 것이다. 하나의 양이 처음 생겨 지극히 미약하므로 아직 여러 음을 이겨 만물을 낳을 수 없다. 여러 양이 와야 비로소 사물을 낳는 공을 이루고 차질이 없으므로 벗이 와야 허물이 없다. 자·축·인의 세 양기가 만물을 낳고 이루니 여러 양의 공이다. 군자의 도가 이미 사라졌다가 돌아온 경우도 어찌 곧바로 소인을 이길 수 있겠는가? 반드시 벗과 무리가 점차 성대해지기를 기다려야 힘을 합해 이길 수 있다.
“그 도를 되풀이하여 칠 일 만에 돌아온다.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사라지고 자라는 도가 되풀이되어 번갈아 이르는 것을 말한다. 양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부터 일곱 번째 변화에 이르러 돌아온다. 구괘는 양이 처음 사라지는 괘다. 일곱 번 변하여 복괘가 되므로 칠 일이라고 하였다. 칠 일은 일곱 차례를 말한다. 임괘에서 ‘팔월에 흉함이 있다’고 한 것은 양이 자라다가 음이 자라기까지 여덟 달을 지남을 말한다. 양이 나아가면 음이 물러나고 군자의 도가 자라면 소인의 도가 사라지므로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단전」에서 말하였다. “복이 형통한 것은 굳센 양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움직이면서 순함으로 행한다. 이 때문에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복이 형통한다는 것은 굳센 양이 돌아와 형통한다는 뜻이다. 양강이 사라지기를 극진히 하다가 돌아왔다. 이미 돌아오면 점차 자라고 성대해져 형통한다. 움직이면서 순함으로 행하므로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는 것은 괘의 재질로 그 까닭을 말한 것이다. 아래는 움직이고 위는 순하므로 움직이면서 순함으로 행한다. 양강이 돌아와 순하게 움직이므로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벗이 오는 것도 순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 도를 되풀이하여 칠 일 만에 돌아오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다.”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로운 것은 굳센 양이 자라기 때문이다.”
“복괘에서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 도가 되풀이되어 가고 오며 번갈아 사라지고 자라다가 칠 일 만에 돌아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운행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사라짐과 자라남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양강한 군자의 도가 자라므로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돌아온 것이 곧 하늘과 땅이 사물을 낳는 마음이다. 선대 학자들은 모두 고요함에서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본다고 했는데, 이는 움직임의 단서가 곧 하늘과 땅의 마음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를 알 수 있겠는가?
「상전」에서 말하였다. “우레가 땅속에 있는 것이 복이니, 선왕은 동짓날에 관문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객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임금이 사방을 순시하지 않았다.”
우레는 음과 양이 서로 부딪쳐 소리를 이룬 것이다. 양이 미약할 때에는 아직 드러날 수 없다. 우레가 땅속에 있으니 양이 처음 돌아오는 때다. 양이 아래에서 처음 생겨 매우 미약하므로 편안하고 고요해야 자랄 수 있다. 선왕은 하늘의 도를 따라 동짓날 양이 처음 생길 때 고요함으로 길렀다. 그러므로 관문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객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임금도 사방을 살펴보지 않았다. 복의 상을 보고 하늘의 도에 순응한 것이다. 한 사람의 몸에서도 그러하다. 마땅히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여 자기 양기를 길러야 한다.
“초구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니 후회에 이르지 않아 크게 길하다.”
복은 양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양은 군자의 도이므로 복은 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된다. 초효의 굳센 양이 돌아와 괘의 처음에 있으니 가장 먼저 돌아온 사람이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잘못한 뒤에 돌아옴이 있다. 잘못이 없다면 무엇에서 돌아오겠는가? 오직 잘못에서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면 후회에 이르지 않아 크게 선하고 길하다. ‘袛’는 마땅히 ‘祗’와 같은 음으로 읽어야 한다. ‘저’는 이른다는 뜻이다. 《옥편》에는 ‘간다’고 했는데 뜻도 같다. ‘후회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감괘에서 ‘이미 평평함에 이를 뿐이면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은 이미 평평한 데 이른다는 뜻이다. 안자는 밖으로 드러난 허물이 없었으므로 공자가 거의 도에 가깝다고 하였고, 이에 후회에 이르지 않았다. 잘못이 아직 형체를 드러내기 전에 고친다면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힘쓰지 않아도 중도에 맞고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므로 잘못은 있다. 그러나 밝고 굳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곧바로 고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후회에 이르지 않으니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袛’는 육덕명이 ‘지’로 읽었으며, 《옥편》·《오경문자》·《군경음변》에는 모두 의부에 실려 있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그것으로 자신을 닦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 군자가 자신을 닦는 도다. 학문의 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선하지 않음을 알면 빠르게 고쳐 선을 따를 뿐이다.
“육이는 아름답게 돌아오니 길하다.”
이는 비록 음효지만 중정한 자리에 있고 초구와 매우 가까우며 뜻으로 양을 따른다. 어진 이에게 낮출 수 있다. 복 가운데 아름다운 사람이다. 복은 예로 돌아오는 것이고 예로 돌아오면 인이 된다. 초구의 양이 돌아왔으니 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는 가까이하면서 자신을 낮추므로 아름답고 길하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아름답게 돌아와 길한 것은 어진 이에게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돌아옴이 아름답고 길한 것은 어진 이에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인은 천하의 공정함이고 선의 근본이다. 초구는 인으로 돌아왔고 육이는 가까이하며 자신을 낮추므로 길하다.
“육삼은 자주 돌아오니 위태롭지만 허물은 없다.”
삼은 조급한 음으로 움직임의 극에 있다. 돌아오기를 자주 하지만 굳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다. 돌아옴은 편안하고 굳음을 귀하게 여긴다. 자주 돌아온다는 것은 자주 잃어버려 돌아옴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다. 선으로 돌아오면서 자주 잃어버리는 것은 위태로운 도다. 성인은 선으로 옮겨 가는 길을 열어 그가 돌아오는 일은 인정하고 자주 잃는 일을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므로 위태롭지만 허물은 없다고 했다. 자주 잃는다고 하여 다시 돌아오는 일을 경계해서는 안 된다. 자주 잃으면 위태롭지만 여러 번 돌아오는 데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잘못은 잃는 데 있고 돌아오는 데 있지 않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자주 돌아와 위태롭지만 의리상 허물은 없다.”
자주 돌아오고 자주 잃어 비록 위태롭지만 선으로 돌아온다는 의리에는 허물이 없다.
“육사는 여러 음의 가운데로 가다가 홀로 돌아온다.”
이 효의 뜻은 가장 자세히 음미해야 한다. 사는 여러 음효 가운데를 가면서도 홀로 돌아올 수 있다. 스스로 바른 자리에 있고 아래로 굳센 양과 호응하므로 그 뜻이 선하다고 할 수 있다. 길흉을 말하지 않은 까닭은 이렇다. 사는 부드러운 음으로 여러 음 사이에 있고, 초구는 이제 막 생겨 매우 미약하므로 서로 도울 수 없다. 일을 구제할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오직 홀로 돌아올 수 있음을 칭찬하고, 홀로 도를 따른다면 반드시 흉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허물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음이 음의 자리에 있어 부드럽고 약함이 심하다. 비록 양을 따르려는 뜻이 있어도 끝내 구제하지 못하므로 허물이 없지는 않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여러 음의 가운데로 가다가 홀로 돌아오는 것은 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홀로 돌아온다고 칭찬한 것은 양강한 군자의 선한 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육오는 돈독하게 돌아오니 후회가 없다.”
육오는 중순한 덕으로 임금의 자리에 있어 선으로 돌아오는 데 돈독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후회가 없다. 비록 본래 선하지만 경계도 그 안에 들어 있다. 양이 돌아왔으나 아직 미약한 때에 부드러운 음으로 존위에 있고 아래에 다시 도울 사람이 없으므로 아직 형통과 길함을 이룰 수는 없다. 후회가 없을 뿐이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돈독하게 돌아와 후회가 없는 것은 중도로 자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중도로 스스로를 이룬다. 오는 음효로 존위에 있고 중도에 있으며 순함을 몸으로 삼는다. 뜻을 돈독히 하여 중도로 스스로를 이루면 후회가 없을 수 있다. ‘스스로 이룬다’는 것은 중순한 덕을 이룬다는 뜻이다.
“상육은 돌아오는 길을 잃으니 흉하다. 재앙과 허물이 있다. 군사를 움직이는 데 쓰면 끝내 크게 패하고, 그 나라의 임금에게까지 흉하다. 십 년이 되어도 정벌하지 못한다.”
부드러운 음으로 복괘의 끝에 있어 끝내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으니 흉함을 알 수 있다. 재앙은 하늘의 재앙으로 밖에서 오고, 허물은 자기 잘못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다. 이미 미혹되어 선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자기에게서는 움직임마다 잘못이고, 재앙도 밖에서 이르는데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 것이다. 도에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으면 무엇에 써도 옳을 수 없다. 군사를 움직이는 데 쓰면 끝내 크게 패한다. 나라를 맡기면 그 임금에게 흉하다. 십 년은 수의 끝이다. 십 년에 이르러도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은 끝내 실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도에 미혹되었는데 어느 때에 행할 수 있겠는가?
「상전」에서 말하였다. “돌아오는 길을 잃어 흉한 것은 임금의 도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돌아오면 도에 합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미혹되면 도와 서로 반대다. 흉함을 알 수 있다. ‘그 나라의 임금에게 흉하다’는 것은 임금의 도를 거스른다는 뜻이다. 임금은 위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을 다스리므로 천하의 선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데 미혹되어 임금의 도를 거스른다. 임금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무릇 돌아오는 데 미혹된 사람은 모두 도를 거슬러 흉하다.
정이천은 복을 음이 극에 이른 동지에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다시 생기는 괘이자 군자(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적 원칙을 지키는 사람)의 도와 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풀이한다. 미약한 양은 혼자서 여러 음을 이기지 못하므로 병 없이 자라고 벗들이 함께 와야 만물을 낳고 공적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칠 일은 구괘에서 양이 사라지기 시작한 뒤 일곱 번의 변화가 지나 복괘가 되는 주기다. 그는 고요함 자체가 아니라 움직임이 막 시작되는 단서에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효들은 잘못에서 돌아오는 여러 양상을 나눈다. 초구(첫째 자리의 양효)는 잘못이 멀리 가기 전에 즉시 고쳐 크게 길하고, 육이(둘째 자리의 음효)는 어진 초구에게 낮추어 아름답게 돌아온다. 육삼은 자주 잃고 자주 돌아와 위태롭지만 돌아옴 자체에는 허물이 없다. 육사는 다수의 음 가운데서 홀로 바름을 따르지만 힘이 약해 성과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육오는 중순으로 스스로를 돈독히 하고, 상육은 끝내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아 모든 행동과 군사·통치가 흉해진다.
주희 《주역본의》
주석 원문과 전체 번역
䷗〈震下坤上〉
復亨出入无疾朋來无咎反復其道七日來復利有攸往〈反復之復方福反又作覆彖同○復陽復生於下也剝盡則為純坤十月之卦而陽氣已生於下矣積之踰月然後一陽之體始成而来復故十有一月其卦為復以其陽既往而復反故有亨道乂内震外坤有陽動於下而以順上行之象故其占又為己之出入既得无疾朋類之來亦得无咎又自五月姤卦一隂始生至此七爻而一陽來復乃天運之自然故其占又為反復其道至於七日當得來復又以剛徳方長故其占又為利有攸往也反復其道往而復來來而復往之意七日者所占來復之期也〉○彖曰復亨剛反〈剛反則亨〉動而以順行是以出入无疾朋來无咎〈以卦徳而言〉反復其道七日來復天行也〈隂陽消息天運然也〉利有攸往剛長也〈長丁丈反○以卦體而言既生則漸長矣〉復其見天地之心乎〈積隂之下一陽復生天地生物之心幾於滅息而至此乃復可見在人則為靜極而動惡極而善本心幾息而復見之端也程子論之詳矣而邵子之詩亦曰冬至子之半天心无改移一陽初動處萬物未生時𤣥酒味方淡太音聲正希此言如不信更請問包羲至哉言也學者宜盡心焉〉○象曰雷在地中復先王以至日閉闗商旅不行后不省方〈安靜以養微陽也月令是月齋戒掩身以待隂陽之所定〉○初九不逺復无祗悔元吉〈祗音其○一陽復生於下復之主也祗抵也又居事初失之未逺能復於善不抵於悔大善而吉之道也故其象占如此〉象曰不逺之復以脩身也○六二休復吉〈柔順中正近於初九而能下之復之休美吉之道也〉象曰休復之吉以下仁也〈下遐嫁反〉○六三頻復厲无咎〈以隂居陽不中不正又處動極復而不固屢失屢復之象屢失故危復則无咎故其占又如此〉象曰頻復之厲義无咎也○六四中行獨復〈四處羣隂之中而獨與初應為與衆俱行而獨能從善之象當此之時陽氣甚微未足以有為故不言吉然理所當然吉凶非所論也董子曰仁人者正其誼不謀其利明其道不計其功於剝之六三及此爻見之〉象曰中行獨復以從道也○六五敦復无悔〈以中順居尊而當復之時敦復之象无悔之道也〉象曰敦復无悔中以自考也〈考成也〉○上六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眚生領反○以隂柔居復終終迷不復之象凶之道也故其占如此以猶及也〉象曰迷復之凶反君道也
진(震)이 아래에 있고 곤(坤)이 위에 있다.
“복은 형통한다.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그 도를 되풀이하여 칠 일 만에 돌아온다.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반복’의 復은 方과 福의 반절이며 覆으로도 쓴다. 「단전」에서도 같다. 복은 양이 아래에서 다시 생기는 것이다. 박이 다하면 순수한 곤이 되어 시월의 괘가 되지만 양기는 이미 그 아래에서 생겼다. 한 달을 넘도록 쌓인 뒤에야 하나의 양이라는 몸체가 비로소 이루어져 돌아온다. 그러므로 십일월의 괘가 복이다. 양이 이미 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므로 형통할 도가 있다. 또 안은 진이고 밖은 곤이어서 양이 아래에서 움직이고 순함으로 위로 올라가는 상이 있다. 따라서 그 점은 자신의 나가고 들어옴에 이미 병이 없고 벗과 무리가 와도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또 오월 구괘에서 하나의 음이 처음 생긴 뒤 이 괘까지 일곱 효를 지나 하나의 양이 돌아온다. 이는 하늘의 운행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점은 또 그 도를 되풀이하여 칠 일에 이르면 마땅히 돌아온다는 것이다. 굳센 덕이 한창 자라므로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는 점도 있다. ‘그 도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갔다가 돌아오고 왔다가 다시 간다는 뜻이다. 칠 일은 점친 일이 돌아올 시기다.
「단전」에서 말하였다. “복이 형통한 것은 굳센 양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굳센 양이 돌아오면 형통한다.
“움직이면서 순함으로 행한다. 이 때문에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다.” 괘의 덕으로 말하였다.
“그 도를 되풀이하여 칠 일 만에 돌아오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다.” 음양이 사라지고 자라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 그러하다.
“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로운 것은 굳센 양이 자라기 때문이다.” 長은 丁과 丈의 반절이다. 괘의 몸체로 말하였다. 이미 생겼으면 점차 자란다.
“복괘에서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쌓인 음의 아래에서 하나의 양이 다시 생기면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마음이 거의 사라진 듯하다가 이때 비로소 다시 보인다. 사람에게서는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움직이고 악이 극에 이르면 선해져, 거의 사라졌던 본심이 다시 드러나는 단서가 된다. 정자는 이를 자세히 논했다. 소강절의 시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는 자시의 절반이니 하늘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나의 양이 처음 움직이는 곳, 만물이 아직 생기지 않은 때다. 맑은 술은 맛이 막 담담하고, 큰 음악은 소리가 참으로 희미하다. 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복희에게 물어보라.’ 지극한 말이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우레가 땅속에 있는 것이 복이니, 선왕은 동짓날에 관문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객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임금이 사방을 순시하지 않았다.”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여 미약한 양을 기른다. 《월령》에서도 이달에 재계하고 몸을 감추어 음양이 정해지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초구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니 후회에 이르지 않아 크게 길하다.” 祗는 其의 음으로 읽는다.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다시 생겨 복괘의 주인이 된다. ‘지’는 이른다는 뜻이다. 또 일이 시작된 처음이라 잘못이 멀리 가지 않았을 때 선으로 돌아올 수 있어 후회에 이르지 않는다. 크게 선하고 길한 도다. 그러므로 그 상과 점이 이와 같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그것으로 자신을 닦는 것이다.”
“육이는 아름답게 돌아오니 길하다.” 부드럽고 순하며 중정하고 초구와 가까워 자신을 낮출 수 있다. 돌아옴 가운데 아름답고 길한 도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아름답게 돌아와 길한 것은 어진 이에게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下는 遐와 嫁의 반절이다.
“육삼은 자주 돌아오니 위태롭지만 허물은 없다.” 음효로 양의 자리에 있어 중정하지 않고 또 움직임의 극에 있으므로 돌아와도 굳게 지키지 못해 자주 잃고 자주 돌아오는 상이다. 자주 잃으므로 위태롭고 돌아오므로 허물이 없다. 따라서 그 점도 이와 같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자주 돌아와 위태롭지만 의리상 허물은 없다.”
“육사는 여러 음의 가운데로 가다가 홀로 돌아온다.” 사는 여러 음효 가운데 있으면서 홀로 초구와 호응한다. 여러 사람과 함께 가면서 홀로 선을 따를 수 있는 상이다. 이때에는 양기가 매우 미약하여 일을 할 만큼 충분하지 않으므로 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치상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므로 길흉은 논할 대상이 아니다. 동중서가 ‘어진 사람은 의를 바르게 할 뿐 이익을 꾀하지 않고, 도를 밝힐 뿐 공을 계산하지 않는다’고 한 뜻을 박괘 육삼과 이 효에서 볼 수 있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여러 음의 가운데로 가다가 홀로 돌아오는 것은 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육오는 돈독하게 돌아오니 후회가 없다.” 중순한 덕으로 존위에 있고 복의 때를 만나니 돈독하게 돌아오는 상이며 후회가 없는 도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돈독하게 돌아와 후회가 없는 것은 중도로 자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고’는 이룬다는 뜻이다.
“상육은 돌아오는 길을 잃으니 흉하다. 재앙과 허물이 있다. 군사를 움직이는 데 쓰면 끝내 크게 패하고, 그 나라의 임금에게까지 흉하다. 십 년이 되어도 정벌하지 못한다.” 眚은 生과 領의 반절이다. 부드러운 음으로 복괘의 끝에 있어 끝내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는 상이며 흉한 도다. 그러므로 그 점이 이와 같다. ‘이’는 ‘및’과 같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돌아오는 길을 잃어 흉한 것은 임금의 도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주희는 복을 박괘가 순수한 곤이 된 시월부터 땅 아래 양기가 생겨 한 달 넘게 쌓인 뒤 십일월에 한 양효(끊기지 않은 선으로 표시한 굳센 효)의 몸체를 이루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오월 구괘의 한 음효(가운데가 끊긴 선으로 표시한 부드러운 효)에서 복괘의 한 양효까지 일곱 효를 지나므로 ‘칠 일’은 점친 일이 회복될 시기이기도 하다. 안의 진이 움직이고 밖의 곤이 순하므로 병 없이 출입하고 벗이 와도 허물이 없으며, 굳센 덕이 자라므로 나아가는 것이 이롭다.
‘천지의 마음’에서는 쌓인 음 아래에서 양이 다시 생기는 순간을 거의 사라졌던 생물의 마음과 인간의 본심이 다시 보이는 단서로 설명하고, 소강절의 동지 시를 모두 인용한다. 육사(넷째 자리의 음효)에서는 양기가 약해 성과를 낼 수 없어도 이치상 선을 따르는 행위는 길흉과 이익을 계산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며 동중서의 말을 연결한다. 상육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상이므로 재앙·패전·통치의 흉함이 한꺼번에 따른다.
정약용(丁若鏞) 《주역사전》
주석 원문과 전체 번역
序卦傳曰剝。窮上反下。故受之以復。〇雜卦傳曰復反也。〇大傳曰復。德之本也。〈乾之根〉復小而辨於物。〈朱子曰陽微而不亂於群陰。〉復以自知。〈內自行〉〇鏞案序卦先剝而後復者。終則有始。天行也。震爲反生。〈說卦文〉故八卦之內。以艮爲剝。以震爲復。〈坎离爲小過中孚〉而八卦方位。終乎艮而始於震。亦剝復之義也。
復亨。出入無疾。朋來無咎。反復其道。七日來復。利有攸往。
此復之不變者也。震道前通。〈震大塗〉於道爲亨。〇一陽之卦。必得坎疾。〈爲心病〉故師謙豫比。皆不免焉。〈皆有坎〉唯剝與復。終不成坎。〈剛不在中故〉此無疾也。陽出爲剝。〈剛在外〉其入爲復。〈剛在內〉出入無疾也。〈皆無坎〉又天行自復。〈前年之冬至〉爲臨爲泰。歷六位而至乾。〈四月卦〉終不成坎。〈行之以震道〉爲姤爲遯。歷六位而至坤。〈十月卦〉終不成坎。〈行之以艮路〉今而後來復。〈今年之冬至〉出入無疾也。〈皆無坎〉行者之筮遇是卦。則其往反平安也。〇剝之時。坤朋前進。〈下五陰〉皆小人之朋也。〈艮小人〉今坤朋復來。〈上五陰〉皆君子之朋也。〈震君子〉雖來何咎。〈異於剝〉〇反復其道者。四時之推遷也。姤一陰始生。而初位無陽。〈巽下絶〉爲遯爲否。〈初仍柔〉爲剝爲坤。〈初仍柔〉初位之不見陽久矣。今而後反之。已七日也。〈每以一卦當一日〉七日者七月也。〈豳風云一之日二之日〉此之謂七日來復。〈復于初〉其道者震道也。〈爲大塗〉〇震道無阻。利有攸往也。〇案一說自剝爲坤。歷坤六位而始反爲復。是七日。其義非也。
春秋傳鄢陵之戰〈成十六年〉晉侯筮之遇復。史曰南國蹙。射其元。王中厥目。〈義詳官占注〉
彖曰復亨。剛反動而以順行。是以出入無疾。朋來無咎。〈句〉反復其道。七日來復。天行也。利有攸往。剛長也。復其見天地之心乎。
復者剝之反。〈翻覆之〉剝以剛止。〈艮止之〉復以剛動。〈震動之〉此剛反動也。坤順在前。以順行也。〇自姤至復。歷七卦而陽復。如夏至冬至。歷七月而陽復。此之謂天行也。〇至仁者天地之心也。〈以生物爲心〉震則爲仁。〈東方卦〉於是乎知其心也。
{〔卦象:䷗〕}初九。不遠復。無祗悔。元吉。〇象曰不遠之復。以脩身也。
此復之坤也。復以豫交。〈雷地爲地雷〉豫自復來。〈一之四〉震足出外。僅至初境。〈四爲上之初〉不遠出也。交之爲復。〈交易之〉剛復其初。〈四之一〉不遠復也。〇本以下震。〈豫本復〉暫出而反。〈四之一〉其道如舊。〈震如昔〉無祗悔也。〈象不變謂之無悔〉祗悔者多悔也。〈或曰祗底通。致也。〉〇元吉者。君道之吉也。震元體仁。其占元吉。〇復之爲豫也。剛往在外。〈一之四〉以正坤民。〈上本坤〉旣而曰不如自修之爲得也。反求諸己。〈四之一〉健以行之。〈爲自強〉是修身也。〈下爲离位离爲修〉〇案諸家皆以七日來復。爲不遠復。夫七日久矣。何爲不遠。使顔子七日而不改過。其可曰不遠復乎。七日復者。四時之運行也。不遠復者。豫卦之交易也。〈初爲卦主。故不取變象。〉
孔子曰顔氏之子。其殆庶幾乎。有不善。〈豫之互坎爲罪過〉未嘗不知。〈坎爲知〉知之。未嘗復行也。〈震出外爲行〉易曰不遠復。無祗悔。元吉。〇案爻變爲坤則無不善之象。亦無回復之形。其取豫。交易之象。審矣。
{〔卦象:䷒〕}六二。休復。吉。〇象曰休復之吉。以下仁也。
此復之臨也。臨以萃交。〈澤地爲地澤〉萃自小過。〈三之五〉皆大坎也。〈萃三六夾坎〉致役乎坤。〈萃下坤〉勞之以坎。〈爲勞卦〉交之爲臨。〈交易之〉則功成而退。〈坎爲功〉以自休息。〈今無坎勞象〉是休復也。〈休否宜參看〉〇兌自萃降。〈今下兌〉以成震仁。〈卦今爲大震〉以下仁也。〈以降下之故爲仁〉〇案君辟之卦。多取交易。唯變所適也。
{〔卦象:䷣〕}六三。頻復。厲無咎。〇象曰頻復之厲。義無咎也。
此復之明夷也。頻者蹙也。〈如顰蹙之顰〉大雅之云國步斯頻是也。〈字從步〉明夷自小過來。〈四之一〉小過之時。震主北征。〈雷山卦〉出在艮疆之外。〈下本艮〉北國蹙也。〈如左傳之云南國蹙〉移之爲明夷則震主退步。〈震爲足〉反乎艮疆之內。〈四之一〉外國拓疆。〈上今坤〉國步斯頻。〈中國蹙〉是頻復也。卦今明夷。故論華夷之勢。〇明夷又自臨來。〈二之三〉兌德乘剛。〈臨下兌〉其象厲也。〈見易例〉移于爲离。〈下今离〉陽升陰降。各得其位。〈二與三〉厲無咎也。〇兌則爲義。〈臨下兌〉義無咎也。〈解初六。漸初六。旣濟初九。皆云義無咎。〇宜參看。〉〇案古本頻作嚬。又鄭玄本作卑。〈或曰當作顰〉虞仲翔解頻爲蹙。漢儒之明於字義。往往如此。〈巽之九三宜參看。〉
{〔卦象:䷲〕}六四。中行獨復。〇象曰中行獨復。以從道也。
此復之震也。震自小過來。〈三之一〉小過者大坎也。〈兼畫三〉坎剛居中。〈三四剛〉其道四通。〈坎爲通〉是中行也。長少二人。〈震與艮〉同在中行。〈中道也〉移之爲震。一人猶行。〈上震則不改〉一人獨反。〈三之一〉中行獨復也。〈如夬九三之獨行〉〇道者震塗也。〈小過之上震〉本以艮迷。〈小過之下艮〉今得震道。〈下今震〉以從道也。〈從上震〉兄弟同行者。筮而遇是。或自中路。兄往而弟歸也。〈震爲長艮爲少〉
{〔卦象:䷂〕}六五。敦復。無悔。〇象曰敦復無悔。中以自考也。
此復之屯也。屯自觀來。〈上之一〉觀者大艮也。〈兼畫三〉坤厚之上。〈觀下坤〉艮德篤實。〈如敦阜敦丘〉厚之至也。移之爲屯。則剛反乎內。〈上之一〉以成震主。〈下今震〉此厚其德而歸也。〈上今坎爲德〉故曰敦復。〇上剛雖反。〈上之一〉敦艮如舊。〈三五互〉是無悔也。〈象不變〉〇考者成也。〈說文云〉坎德正中。〈上今坎〉艮以成之。〈三五互〉中以自考也。〇案爾雅丘再成曰敦。〈卽敦丘〉坤土艮山。再成之象也。故易例。坤艮之合爲敦。〈如敦臨敦艮〉
{〔卦象:䷚〕}上六。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〇象曰迷復之凶。反君道也。
此復之頤也。頤自觀來。〈五之一〉觀者大艮也。〈兼畫三〉徑路前迷。〈上今艮〉窮而反本。〈五之一〉是迷復也。自剝爲坤。自坤爲復。旣遵道而得路。〈震大塗〉今而爲艮。〈上今艮〉徑路又迷。〈見坤卦〉此剝卦之舊迷也。〈剝上艮〉不亦凶乎。頤自觀來。〈五之一〉巽變爲艮。〈加一陰〉觀乃成剝。今之爻象。恍如昔也。〇遂成大离。〈上下夾〉离則有災。〈离爲火〉四陰在中。〈二至五〉陰則多眚。〈坎爲堅多眚謂多陰也〉凡隕霜失火彗孛之類。不可免也。〇頤又自臨來。〈二之上〉震主〈二四互〉領衆。〈坤爲衆〉往征坤國。〈二之上〉遂成艮鬼。〈上今艮〉載之坤輿。〈三五坤〉輿尸之凶也。坤本敵國。艮爲終境。〈萬物終乎艮〉此深入敵境。而終覆其師也。〈終大敗〉本以震君。〈臨大震〉今爲艮死。〈上今艮〉國君之凶也。〇地數則十。〈坤爲均〉艮以止之。〈說卦文〉十年不征也。〇王道蕩蕩。震大道之謂也。今乃捷徑以窘步。〈艮爲徑〉致皇輿之敗績。反君道也。〈與震反〉
春秋傳〈襄二十八年〉鄭游吉如楚。歸告子展曰在復之頤曰迷復凶。其楚子之謂乎。欲復其願。〈大离志〉而棄其本。〈臨二之上棄震根〉欲歸無所。〈頤以小過交易。大坎旣亡。無所歸也。〉是謂迷復。能無凶乎。楚不幾十年。未能恤諸侯也。
「서괘전」에서 말하였다. ‘박괘는 위에서 다하면 아래로 되돌아가므로 복괘로 받았다.’ 「잡괘전」에서 말하였다. ‘복은 돌아옴이다.’ 「계사전」에서 말하였다. ‘복은 덕의 근본이다.’ 〈건괘의 뿌리이다.〉 ‘복은 작으면서도 사물과 분별된다.’ 〈주자는 ‘양이 미약하지만 여러 음과 뒤섞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복은 스스로 아는 데 쓰인다.’ 〈안에서 스스로 행한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서괘전」이 박괘를 앞에 두고 복괘를 뒤에 둔 것은 끝나면 시작이 있기 때문이니, 하늘의 운행이다. 진은 되살아남이 된다. 〈「설괘전」의 글이다.〉 그러므로 팔괘 안에서 간을 박으로 삼고 진을 복으로 삼았으며 〈감과 리는 소과괘와 중부괘가 된다.〉, 팔괘의 방위가 간에서 끝나고 진에서 시작하는 것 또한 박괘와 복괘의 뜻이다.
복(復)은 형통하다.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다. 벗들이 오더라도 허물이 없다. 그 길을 돌아오고 다시 가서 일곱 날 만에 와서 돌아온다.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이는 복괘가 변하지 않은 경우이다. 진괘의 길은 앞으로 트여 있으니 〈진은 큰길이 된다.〉 길에서는 형통하다. 양 하나만 있는 괘는 반드시 감괘의 병을 얻으므로 〈마음의 병이 된다.〉 사괘ㆍ겸괘ㆍ예괘ㆍ비괘가 모두 이를 면하지 못한다. 〈모두 감괘가 있다.〉 오직 박괘와 복괘는 끝내 감괘를 이루지 않는다. 〈강효가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병이 없다는 말이다. 양이 밖으로 나가면 박괘가 되고 〈강효가 밖에 있다.〉 안으로 들어오면 복괘가 된다. 〈강효가 안에 있다.〉 그러므로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다. 〈둘 다 감괘가 없다.〉 또 하늘의 운행은 복괘에서 시작하여 〈지난해 동지이다.〉 임괘와 태괘가 되고 여섯 자리를 지나 건괘에 이르지만 〈사월의 괘이다.〉 끝내 감괘를 이루지 않는다. 〈진괘의 길로 운행한다.〉 다시 구괘와 둔괘가 되어 여섯 자리를 지나 곤괘에 이르지만 〈시월의 괘이다.〉 끝내 감괘를 이루지 않는다. 〈간괘의 길로 운행한다.〉 이제야 다시 와서 복괘가 되니 〈금년 동지이다.〉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다. 〈모두 감괘가 없다.〉 길 가는 사람이 점쳐 이 괘를 얻으면 갔다 돌아오는 길이 평안하다. 박괘 때에는 곤괘의 벗들이 앞다투어 나아가니 〈아래의 다섯 음이다.〉 모두 소인의 벗이었다. 〈간은 소인이 된다.〉 이제 복괘에서는 곤괘의 벗들이 다시 오지만 〈위의 다섯 음이다.〉 모두 군자의 벗이다. 〈진은 군자가 된다.〉 비록 오더라도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그 길을 돌아오고 다시 간다’는 것은 사계절이 옮겨 가는 일이다. 구괘에서 음 하나가 처음 생기면 초효 자리에 양이 없고 〈손괘의 아래가 끊어졌다.〉 둔괘와 비괘가 되어도 〈초효는 그대로 유효이다.〉 박괘와 곤괘가 되어도 〈초효는 그대로 유효이다.〉 초효 자리에 양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다. 이제야 비로소 양이 돌아왔으니 이미 일곱 날이다. 〈매번 괘 하나를 날 하나로 친다.〉 일곱 날은 일곱 달이다. 〈《시경》 〈빈풍〉에서 ‘첫째 날’, ‘둘째 날’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일곱 날 만에 와서 돌아온다고 한다. 〈양이 초효로 돌아온다.〉 그 길은 진괘의 길이다. 〈큰길이 된다.〉 진괘의 길에는 막힘이 없으므로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어떤 설에서는 박괘에서 곤괘가 되고 곤괘의 여섯 자리를 지난 뒤 처음 돌아와 복괘가 되므로 일곱 날이라고 하였으나, 그 뜻은 옳지 않다.
《춘추좌씨전》에서 언릉 전투 때에 〈성공 16년이다.〉 진후가 점을 쳐 복괘를 얻었다. 사관이 말하였다. ‘남쪽 나라가 위축될 것입니다. 그 우두머리를 쏘면 왕의 눈에 화살이 맞을 것입니다.’ 〈뜻은 〈관점〉의 주석에 자세하다.〉
「단전」에서 말하였다. ‘복괘가 형통하다는 것은 굳센 양이 돌아와 움직이고 순응함으로써 행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고 벗들이 와도 허물이 없다. 〈여기서 구를 뗀다.〉 그 길을 돌아오고 다시 가서 일곱 날 만에 와서 돌아오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다.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이로운 것은 굳센 양이 자라기 때문이다.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복괘는 박괘를 뒤집은 것이다. 〈뒤집어 엎은 것이다.〉 박괘에서는 강효가 멈추고 〈간괘가 멈춘다.〉 복괘에서는 강효가 움직인다. 〈진괘가 움직인다.〉 이것이 굳센 양이 돌아와 움직인다는 말이다. 곤괘의 순응함이 앞에 있어 순응함으로써 행한다. 구괘에서 복괘에 이르기까지 일곱 괘를 지나 양이 돌아오니, 하지에서 동지까지 일곱 달을 지나 양이 돌아오는 것과 같다. 이를 하늘의 운행이라 한다. 지극한 어짊은 천지의 마음이다. 〈만물을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다.〉 진은 어짊이 되니 〈동방의 괘이다.〉 여기에서 천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괘상:䷗〕} 초구.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므로 많은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다. 크게 길하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자신을 닦는 것이다.’
이는 복괘가 곤괘로 변한 경우이다. 복괘는 예괘와 자리를 바꾼다. 〈뇌지복괘가 지뢰예괘가 된다.〉 예괘는 복괘에서 왔다. 〈초효가 사효로 갔다.〉 진괘의 발이 밖으로 나가 겨우 처음 경계에 이르렀을 뿐이니 〈사효는 상괘의 첫 자리이다.〉 멀리 나가지 않은 것이다. 이를 바꾸어 복괘로 만들면 〈자리를 바꾼 것이다.〉 강효가 초효로 돌아오니 〈사효가 초효로 온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본래 아래에 진괘가 있었고 〈예괘는 본래 복괘이다.〉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므로 〈사효에서 초효로 온다.〉 그 길이 예전과 같다. 〈진괘가 옛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많은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다. 〈상이 변하지 않는 것을 뉘우침이 없다고 한다.〉 지회(祗悔)는 뉘우침이 많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지(祗)를 지(底)와 통하는 글자로 보아 ‘이르게 함’이라 한다.〉 ‘크게 길하다’는 것은 임금의 도가 길하다는 말이다. 진은 원(元)이며 인을 몸으로 삼으므로, 그 점이 크게 길하다. 복괘가 예괘가 될 때에는 강효가 밖으로 가서 〈초효가 사효로 간다.〉 곤괘의 백성을 바르게 다스린다. 〈위는 본래 곤괘이다.〉 그러나 이내 남을 바로잡는 것이 자신을 닦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 자기에게 돌이켜 구하고 〈사효가 초효로 온다.〉 굳세게 행하니 〈스스로 힘쓰는 것이 된다.〉, 이것이 자신을 닦는 것이다. 〈아래는 리괘가 놓이는 자리이고 리는 닦음이 된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여러 학자는 모두 ‘일곱 날 만에 와서 돌아온다’는 말을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으로 여겼다. 일곱 날은 오래인데 어찌 멀지 않다고 하겠는가. 안자가 허물을 고치는 데 일곱 날이나 걸렸다면 그것을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곱 날 만에 돌아옴은 사계절의 운행이고,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옴은 예괘와 복괘가 자리를 바꾸는 일이다. 〈초효가 괘의 주인이므로 효변의 상을 취하지 않았다.〉
공자가 말하였다. ‘안씨의 아들은 거의 도에 가까울 것이다. 선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예괘의 호괘인 감괘는 죄와 허물이 된다.〉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었고 〈감은 앎이 된다.〉, 알고 나서는 다시 행한 적이 없었다. 〈진괘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행함이 된다.〉 《주역》에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므로 많은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다. 크게 길하다”라고 하였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효가 변하여 곤괘가 되면 선하지 못하다는 상도 없고 돌아온다는 형상도 없다. 예괘와 복괘가 자리를 바꾸는 상을 취한 것이 분명하다.
{〔괘상:䷒〕} 육이. 아름답게 돌아온다. 길하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아름답게 돌아오는 길함은 어짊을 낮추기 때문이다.’
이는 복괘가 임괘로 변한 경우이다. 임괘는 췌괘와 자리를 바꾼다. 〈택지췌괘가 지택임괘가 된다.〉 췌괘는 소과괘에서 왔고 〈삼효가 오효로 갔다.〉 둘 다 큰 감괘이다. 〈췌괘의 삼효와 상효가 감괘를 끼워 이룬다.〉 곤괘에서 일을 다하고 〈췌괘의 아래가 곤이다.〉 감괘로 수고한다. 〈감은 수고로운 괘가 된다.〉 이를 바꾸어 임괘로 만들면 〈자리를 바꾼 것이다.〉 공을 이루고 물러나 〈감은 공이 된다.〉 스스로 휴식한다. 〈이제 감괘의 수고로운 상이 없다.〉 이것이 아름답게 돌아온다는 말이다. 〈비괘의 휴비(休否)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태괘가 췌괘에서 내려와 〈이제 아래의 태괘이다.〉 큰 진괘의 인을 이루니 〈지금 괘가 큰 진괘이다.〉, 이것이 어짊을 아래로 낮춘다는 말이다.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에 어짊이 된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군주에 해당하는 벽괘에서는 자리를 바꾸는 상을 많이 취하니, 오직 변화가 향하는 바를 따른다.
{〔괘상:䷣〕} 육삼. 찡그리며 돌아온다. 위태롭지만 허물이 없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찡그리며 돌아오는 위태로움은 의리상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는 복괘가 명이괘로 변한 경우이다. 빈(頻)은 찡그림이다. 〈빈축(顰蹙)의 빈(顰)과 같다.〉 《시경》 〈대아〉에서 ‘나라의 걸음이 이에 위축되었다[國步斯頻]’고 한 말이 이것이다. 〈글자가 보(步)를 따른다.〉 명이괘는 소과괘에서 왔다. 〈사효가 초효로 갔다.〉 소과괘 때에는 진괘의 임금이 북쪽을 정벌하러 가서 〈뇌산소과괘이다.〉 간괘의 국경 밖으로 나가 있으니 〈아래는 본래 간괘이다.〉 북쪽 나라가 위축된다. 〈《좌전》에서 ‘남쪽 나라가 위축된다’고 한 말과 같다.〉 이를 옮겨 명이괘로 만들면 진괘의 임금이 걸음을 물려 〈진은 발이 된다.〉 간괘의 국경 안으로 돌아오고 〈사효가 초효로 간다.〉 바깥 나라는 영토를 넓히므로 〈위는 이제 곤괘이다.〉 나라의 걸음이 위축된다. 〈중국이 위축되는 것이다.〉 이것이 찡그리며 돌아온다는 말이다. 괘가 지금 명이괘이므로 중화와 오랑캐의 형세를 논하였다. 명이괘는 또 임괘에서 왔다. 〈이효가 삼효로 갔다.〉 태괘의 덕이 강효 위에 타고 있으니 〈임괘의 아래가 태이다.〉 그 상이 위태롭다. 〈《주역》의 통례에 보인다.〉 이를 옮겨 리괘로 만들면 〈아래는 이제 리괘이다.〉 양은 올라가고 음은 내려가 각각 제자리를 얻으므로 〈이효와 삼효이다.〉 위태롭지만 허물이 없다. 태괘는 의리가 되므로 〈임괘의 아래가 태이다.〉 의리상 허물이 없다. 〈해괘 초육ㆍ점괘 초육ㆍ기제괘 초구에 모두 ‘의리상 허물이 없다’고 하였으니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옛 판본에는 빈(頻)을 빈(嚬)으로 썼고 정현의 판본에는 비(卑)로 썼다. 〈어떤 이는 마땅히 빈(顰)으로 써야 한다고 하였다.〉 우번은 빈을 축(蹙), 곧 위축됨으로 풀이하였다. 한대 유학자가 글자의 뜻에 밝았던 것이 이따금 이와 같다. 〈손괘 구삼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괘상:䷲〕} 육사. 가운데 길을 가다가 홀로 돌아온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가운데 길을 가다가 홀로 돌아오는 것은 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복괘가 진괘로 변한 경우이다. 진괘는 소과괘에서 왔다. 〈삼효가 초효로 갔다.〉 소과괘는 큰 감괘이다. 〈세 획을 겸하여 그린 것이다.〉 감괘의 강효가 가운데에 있고 〈삼효와 사효의 강효이다.〉 그 길이 사방으로 통하니 〈감은 통함이 된다.〉 이것이 가운데 길을 가는 것이다. 장남과 소남 두 사람이 〈진괘와 간괘이다.〉 함께 가운데 길에 있었는데 〈가운데 길이다.〉 이를 옮겨 진괘로 만들면 한 사람은 여전히 가고 〈위의 진괘는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만 홀로 돌아온다. 〈삼효가 초효로 간다.〉 이것이 가운데 길을 가다가 홀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쾌괘 구삼의 ‘홀로 감’과 같다.〉 도는 진괘의 길이다. 〈소과괘의 위가 진이다.〉 본래 간괘 때문에 길을 잃었으나 〈소과괘의 아래가 간이다.〉 이제 진괘의 길을 얻으니 〈아래가 이제 진이다.〉, 도를 따른 것이다. 〈위의 진괘를 따른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 점쳐 이 효를 얻으면, 가운데 길에서 형은 계속 가고 아우는 돌아오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진은 장남이고 간은 소남이다.〉
{〔괘상:䷂〕} 육오. 도탑게 돌아온다. 뉘우침이 없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도탑게 돌아와 뉘우침이 없는 것은 가운데에 있으면서 스스로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복괘가 준괘로 변한 경우이다. 준괘는 관괘에서 왔다. 〈상효가 초효로 갔다.〉 관괘는 큰 간괘이다. 〈세 획을 겸하여 그린 것이다.〉 두터운 곤괘의 위에서 〈관괘의 아래가 곤이다.〉 간괘의 덕이 도탑고 실하니 〈높고 두터운 언덕과 같다.〉 두터움의 지극함이다. 이를 옮겨 준괘로 만들면 강효가 안으로 돌아와 〈상효가 초효로 간다.〉 진괘의 임금을 이룬다. 〈아래가 이제 진이다.〉 이는 그 덕을 두텁게 하여 돌아오는 것이다. 〈위는 이제 감괘가 되어 덕이 된다.〉 그러므로 도탑게 돌아온다고 하였다. 위의 강효가 비록 돌아왔어도 〈상효가 초효로 간다.〉 도타운 간괘가 예전과 같으니 〈삼효와 오효가 호괘를 이룬다.〉 뉘우침이 없다. 〈상이 변하지 않는다.〉 고(考)는 이룸이다. 〈《설문해자》에서 말하였다.〉 감괘의 덕이 바르게 가운데에 있고 〈위가 이제 감괘이다.〉 간괘가 이를 이루니 〈삼효와 오효가 호괘를 이룬다.〉, 이것이 가운데에 있으면서 스스로 이룬다는 말이다. 정약용이 살피건대, 《이아》에서 ‘언덕이 두 겹으로 이루어진 것을 돈(敦)이라 한다’고 하였다. 〈곧 도타운 언덕이다.〉 곤괘의 땅과 간괘의 산이 두 겹으로 이루어진 상이다. 그러므로 《주역》의 통례에서 곤괘와 간괘가 합한 것을 돈이라 한다. 〈임괘의 돈림(敦臨)과 간괘의 돈간(敦艮) 같은 것이다.〉
{〔괘상:䷚〕} 상육. 길을 잃고 돌아오니 흉하고 재앙과 허물이 있다. 군대를 출동시키면 끝내 크게 패하며, 그 나라 임금에게도 흉하다. 십 년에 이르도록 정벌할 수 없다. 「상전」에서 말하였다. ‘길을 잃고 돌아오는 흉함은 임금의 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는 복괘가 이괘로 변한 경우이다. 이괘는 관괘에서 왔다. 〈오효가 초효로 갔다.〉 관괘는 큰 간괘이다. 〈세 획을 겸하여 그린 것이다.〉 지름길이 앞에서 어지러워 길을 잃다가 〈위는 이제 간괘이다.〉 궁한 뒤에 근본으로 돌아오니 〈오효가 초효로 간다.〉, 이것이 길을 잃고 돌아온다는 말이다. 박괘에서 곤괘가 되고 곤괘에서 복괘가 되어 이미 큰길을 따라 길을 얻었는데 〈진은 큰길이 된다.〉, 이제 간괘가 되어 〈위는 이제 간괘이다.〉 지름길에서 다시 길을 잃는다. 〈곤괘에 보인다.〉 이것은 박괘 때의 옛 미혹이다. 〈박괘의 위가 간이다.〉 어찌 흉하지 않겠는가. 이괘는 관괘에서 왔으니 〈오효가 초효로 간다.〉 손괘가 변하여 간괘가 되고 〈음 하나를 더한다.〉 관괘가 이에 박괘를 이룬다. 지금 효의 상이 옛 모습과 흡사하다. 마침내 큰 리괘를 이루는데 〈위아래가 끼워 이룬다.〉 리괘에는 재앙이 있다. 〈리는 불이 된다.〉 네 음이 가운데 있으니 〈이효에서 오효까지이다.〉 음에는 허물이 많다. 〈감은 굳고 허물이 많다는 말은 음이 많다는 뜻이다.〉 무릇 서리가 내리고 불이 나며 혜성이나 패성이 나타나는 따위의 일을 면할 수 없다. 이괘는 또 임괘에서 왔다. 〈이효가 상효로 갔다.〉 진괘의 임금이 〈이효와 사효가 호괘를 이룬다.〉 곤괘의 무리를 거느리고 〈곤은 무리가 된다.〉 곤괘의 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이효가 상효로 간다.〉 마침내 간괘의 귀신이 되어 〈위는 이제 간괘이다.〉 곤괘의 수레에 실리니 〈삼효와 오효가 곤괘를 이룬다.〉, 시체를 수레에 싣는 흉함이다. 곤괘는 본래 적국이고 간괘는 끝의 경계이니 〈만물은 간에서 끝난다.〉, 이는 적의 경계 깊숙이 들어갔다가 끝내 그 군대를 전복하는 것이다. 〈끝내 크게 패한다.〉 본래 진괘의 임금이었는데 〈임괘는 큰 진괘이다.〉 이제 간괘의 죽음이 되니 〈위는 이제 간괘이다.〉 나라 임금의 흉함이다. 땅의 수는 십이고 〈곤은 고름이 된다.〉 간괘가 이를 멈추므로 〈「설괘전」의 글이다.〉 십 년 동안 정벌하지 못한다. 왕도는 넓고도 넓으니, 곧 진괘의 큰길을 이른다. 그런데 이제 지름길로 가서 걸음을 곤궁하게 하다가 〈간은 지름길이 된다.〉 황제의 수레가 부서지는 데 이르니, 임금의 도에 어긋난 것이다. 〈진괘와 반대된다.〉
《춘추좌씨전》에서 〈양공 28년이다.〉 정나라 유길이 초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자전에게 말하였다. ‘복괘가 이괘로 변한 데서 “길을 잃고 돌아오니 흉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초나라 임금을 이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뜻을 회복하려 하지만 〈큰 리괘는 뜻이 된다.〉 그 근본을 버렸으므로 〈임괘 이효가 상효로 가서 진괘의 뿌리를 버렸다.〉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괘는 소과괘와 자리를 바꾸는데 큰 감괘가 이미 없어져 돌아갈 곳이 없다.〉 이것을 길을 잃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어찌 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나라는 거의 십 년 동안 제후들을 돌볼 수 없을 것입니다.’
복괘는 박괘와 곤괘를 거쳐 한 양이 초효로 되돌아온 괘이다. 정약용은 ‘일곱 날’을 구괘에서 복괘까지의 일곱 괘이자 하지에서 동지까지의 일곱 달로 풀이하고, 각 효를 예ㆍ췌ㆍ소과ㆍ관ㆍ임괘와의 교역 및 효의 이동으로 검증한다. 멀지 않은 복귀는 수신, 아름다운 복귀는 인을 낮춤, 도타운 복귀는 덕의 완성인 반면, 지름길을 좇아 근본을 버린 상육(맨 위 자리의 음효)의 복귀는 군대와 임금이 함께 패하는 미복이 된다.
교감·번역 주